한국사 공부

대한제국의 멸망, 망국에서 싹튼 민족반역자와 항거인

정알못 2021. 2. 25. 16:05

1895

-22: 교육입국조서 반포

-417: 청일전쟁 일본 승리

-108: 을미사변

-1026: 을미개혁-태양력 도입

-1230: 을미개혁-단발령

이미지 출처: 우리역사넷

 

당시 백성들은 단발 자체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자발적 단발이라면 한 줌의 짧은 머리터럭을 아끼지 않을 것이지만 무력을 동원한 강제 단발은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출처: https://news.joins.com/article/21921473

 

그러네! 단발하는 것, 고종이 몸소 보여주는 것은 괜찮지만 강제로 머리를 자르게 하는 것은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잖아. 과연 정신적 굴복 사건임은 맞다.

 

1896

-211: 고종, 아관파천

이미지 출처: http://www.sisaweek.com/news/articleView.html?idxno=19788

-47: 독립신문 창간

-72: 독립협회 결성

 

1897

211: 고종의 경운궁 환궁(1년만에 돌아오셨군)

219: 한성은행 창립

1011: 광무개혁

: 고종황제의 연호인 광무(光武)’를 따서 광무개혁(光武改革)’이라고 부른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광무개혁(光武改革))]

광무개혁 주도 인물:

윤용선

*참고: 1894515일에 마지막 과거 시험이 치러졌다.

-1885(고종 22) 증광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 직후 성립된 친러정부에 보수세력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탁지부대신으로 있다가, 422일 내각 총리대신으로 임명되었다.

- 대한제국 성립 이후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제정하기 위해 종전의 교전소를 법규교정소(法規校正所)로 개편할 때 총재직을 역임하였다.

심순택

1850(철종 1) 증광 문과에 급제하고, 1862년 예방승지(禮房承旨), 1874(고종 11)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1878년 예조·형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에 도봉소당상(都捧所堂上)으로 있었고, 군란의 책임을 지고 파면되었다. 1884년 우의정, 그뒤 좌의정을 역임하였고,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뒤 새롭게 조직된 수구당내각에서 영의정에 올랐다.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 직후 보수적 새 정부에 참여하여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고, 1897년 대한제국의 수립과 함께 새로이 의정(議政)으로 임명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심순택 [沈舜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정양

1866(고종 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1879년 형조참판을 지냈고,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문물을 시찰하고 귀국해 이용사당상경리사(理用司堂上經理事)가 되었다.

1887년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를 거쳐 주미전권공사(駐美全權公使)에 임명되었으나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압력으로 출발을 연기하였다가 그 해 말에 청나라의 방해를 무릅쓰고 미국 대통령 클리블랜드(Cleveland, S. G.)에게 신임장을 제정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박정양 [朴定陽]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Q. 위안스카이가 누구인가요?

중국의 군인 ·정치가이며 총리교섭통상대신으로 조선에 부임하여 국정을 간섭하고 일본, 러시아를 견제했다. 청일전쟁에 패한 뒤 서양식 군대를 훈련시켜 북양군벌의 기초를 마련하고 탄쓰퉁 등 개혁파를 배반하고 변법운동을 좌절시켰다. 이후 의화단의 난을 진압했으며 신해혁명 때 청나라 조정의 실권을 잡고 임시총통이 되었고, 이어 스스로 황제라 칭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위안스카이 [袁世凱(원세개)] (두산백과) + 이미지 출처(문화일보)

이 해 11월 제2차 김홍집내각(第二次金弘集內閣)의 학무대신이 되고, 1895년 김홍집내각이 붕괴되자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을미개혁을 추진하였다. 왕궁호위병 교체문제로 사표를 제출하였으나 일본의 협조로 유임되었다.1898년 독립협회가 주최하는 만민공동회에 참석해 시정의 개혁을 약속했으나 수구파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11월 황국협회(皇國協會)가 폭력으로 독립협회를 탄압한 사건이 일어나 내각이 경질되자 다시 내부대신이 되었다. 조선 말기의 불편부당한 온건중립파로서 진보적인 개화사상을 가지고 이상재(李商在) 등 개화파 인사들을 지원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박정양 [朴定陽]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민병석

일제강점기 농상공부대신, 이왕직장관, 중추원 부의장 등을 역임한 관료. 정치인·친일반민족행위자.

러일전쟁 발발 직후 궁내부대신으로서 19043월 방문한 일본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영접하는 행사를 지휘했고, 이토 히로부미가 건넨 30만 엔을 고종에게 전달했다. 그해 5월 그 공로로 일본 정부가 주는 훈1등 욱일장을 받았다. 궁내부대신으로 같은 해 5월 어공원경(御供院卿)8월 장례원경(掌禮院卿), 9월 시종원경을 겸임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민병석 [閔丙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와 대놓고 고종 꼽주네.. 아무리 무능해도 너네 나라 왕이었잖아!!! 광무개혁 주도한 사람 맞어?

 

심상훈

고종의 비밀 트위터 역할을 하였다. 임오군란 때의 민비, 갑신정변 때의 고종에게 밀고. 동학교도 탄압. 백동화 주조. -> 독립협회로부터 탄핵의 대상이 되었다가, 1898년에 체직처분을 받았다.

 

박제순

1858(철종 9)1916. 문관·고위관료·정치가·친일반민족행위자

 

민영환

1877(고종 14)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으며, 이듬해 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 정자(正字검열·설서(說書수찬(修撰검상(檢詳사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1882년 폭발한 임오군란의 발발로 아버지 민겸호가 살해되자 사직하였다.러일전쟁 후 다시 내부대신·군법교정총재(軍法校正總裁학부대신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날로 심해지는 일본의 내정 간섭에 항거하여 친일 내각과 대립하였기 때문에 한직인 시종무관으로 좌천당하였다.민영환의 자결 소식이 전해지자, 원임대신 조병세를 비롯한 전참판 홍만식(洪萬植), 학부 주사 이상철(李相喆), 평양대(平壤隊) 일등병 김봉학(金奉學) 등 많은 인사들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민영환의 인력거꾼도 목숨을 끊어 일제 침략에 항거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민영환 [閔泳煥]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012: 대한제국 수립, 고종 황제 등극

 

1898

127: 대한제국 한성전기회사 설립(feat. 미국)

529: 명동성당 6년만에 준공

630: 보부상단체 황국협회 설립

810: 제국신문 창간(이승만, 이종일, 유영석)

95: 황성신문 창간(남궁억, 장지연)

*장지연- 1905년 시일야방성대곡 기고한 사람.

1029: 독립협회 주간의 관민공동회-> 헌의 6조 발표

112: 중추원 신 관제

115: 만민 공동회

1228: 독립협회 해산

 

1899

918: 대한제국 경인선 철도 개통

 

1900

-최초 전등 사용(3)

 

1901

514: 신축민란

1901, 제주도에서 일어난 제주 토착민들의 가톨릭 신자 학살 사건.

주동자인 이재수의 이름을 딴 '이재수의 난'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공식 명칭은 신축민란이다.

가톨릭에서는 "가톨릭 신자가 희생되었다."라는 의미로 '제주신축교난(濟州辛丑敎難)'이라고 부르며, '제주민란(濟州民亂)'으로 불리기도 한다. 다만 단순히 종교적인 문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그들이 부린 행패와 엄청난 범죄행각으로 인한 사건이기 때문에 교난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런 문제제기로 인해 일방적인 피해의 느낌이 강한 '교난'보다 어감이 좀 완화된 '신축교안(辛丑敎案)'이란 용어 또한 쓰이고 있다.

820: 경부선 기공

 

1904

28: 러일전쟁, 제물포 해전

212: 대한제국과 러시아 단교

223: 한일의정서

전체적으로 대한제국의 안전을 지킨다는 대전제를 내세우고, 이를 빙자하여 일본은 한국의 영토를 전략적으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하여 러-일전쟁에 대비하였고, 국가 통치(시정)에 있어서 일본의 충고를 받도록 하였다. 이는 일본이 러-일전쟁시에 한국을 중립이 아닌 확실한 우군으로 끌어들여 전승 전략을 세움과 동시에, 장기적으로는 한국을 침략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일의정서 [韓日議定書] (두산백과)

820: 일진회 설립

일본에 망명해 있던 송병준은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군사 통역으로 귀국하여 일본군을 배경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전 독립협회 회원이던 윤시병(尹始炳유학주(兪鶴柱) 등과 접촉하여 1904818일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고 임시회장에 윤시병을 추대하였다. 20일 회명을 일진회로 개칭하고 회장에 윤시병, 부회장에 유학주를 추대하였다.일진회가 대한제국기 후반에 등장한 수많은 사회단체 중 유일하게 19048월부터 19109월까지 6년여의 긴 시간동안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을 모델로 한 문명개화노선과 국내의 정치적 주도권 장악을 위한 계획과 실행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수반된 일본과의 협력은 초기 일진회의 성격이나 내적인 계열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망국을 초래한 매국단체로 평가하게 만들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일진회 [一進會]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송병준 그는 어떤 반민족행위자인가?

어린 시절을 향리에서 보내다 상경하여 당시 세도가인 민영환(閔泳煥)의 식객(食客)이 되었다. 1871(고종 8) 3월 무과에 급제하고, 거듭 중시(重試)에 합격해 무관으로 수문장에 임명되었다.

강화도 조약에서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 일행의 반접(伴接) 수행원을 맡았고 일본의 대표적 실업가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와 함께 부산에 본인 명의로 상관(商館)을 개설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가재가 불탔고, 1884년 갑신정변 때에도 가옥과 재산을 모두 잃었다. 이후 일본인 주선으로 일본에 건너가 1885년 귀국했다. 1886년 일본에 망명 중인 김옥균(金玉均)을 암살하라는 밀명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도리어 김옥균의 인품에 공명해 동지가 되었다. 1886년 귀국 후 김옥균과 통모(通謀)한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민영환의 주선으로 100일 후 풀려났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병참감 일본 육군 소장 오다니 기쿠조[大谷喜久藏]의 군사통역으로 귀국하였다. 통역관으로 경성군사령부에서 활동하면서 일본군과 같이 청국까지 종군하였다. 그해 4월 서울에 돌아온 뒤, 전세가 일본에게 유리하게 진전되는 것을 보고 일본군을 배경으로 정치활동을 꾀하였다.

 

1904818일 윤시병(尹始炳유학주(兪鶴柱) 등과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고, 20일에 다시 일진회(一進會)로 이름을 바꾸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송병준 [宋秉畯]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일본 관련 접촉을 하여 사업도 하고 이득을 얻었다가 임오군란, 갑신정변 때문에 재산을 잃었다. 뭐 여기까지는 뭔가 불쌍한데 일본에 오면서 김옥균 암살 생각을 하게 되고 나라 흥망성쇠 예측을 기막히게 하는 그 머리로 다른 걸 좀 생각해보지 일진회 창설이라니 헐~~~ 민영환, 김옥균같은 분들 보면서 뭐 느끼는 게 없었나봄...

 

1905

55: 이용익이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용익이 누구인가?

1882(고종 19)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장호원(長湖院)으로 피신하자 남다른 빠른 걸음으로 연락을 취하여 민영익의 신임을 받았다. 흥선대원군이 청나라로 압송되고 명성황후가 다시 환궁하자 종9품의 관직인 감역(監役)이 되었다.

부보상 출신이며 황실의 재정을 담당하였다. 국가 재정을 강화하기 위해 경제정책을 주도하였고, 개혁당을 조직하여 친일파와 맞섰다. 러일전쟁의 위기감이 고조되자 이용익은 고종을 설득하여 대한제국의 중립을 선언하였다. 위기를 느낀 일본은 러시아와 국교를 단절하고 서울로 군대를 파견하였고 1904년 외무대신 이지용(李址容)을 내세워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체결하였는데 이때 이용익이 나서 이를 반대하였다가 일본으로 강제 납치되었다. 귀국 후 경북관찰사에 등용되었는데, 친일파 일진회의 극심한 견제를 받았다. 그는 일본에 억류된 1년동안 일본의 근대화된 문물을 접하고 교육이 나라를 구하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보성사(普成社) 인쇄소를 차리고 보성학원(普成學院: 지금의 고려대학교, 보성중·고등학교)을 설립하였다. 이후 해외에서 구국운동을 펼치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사망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용익 [李容翊] (두산백과)

 

-> 초기 생애를 봤을 땐 그냥 고종의 충신이겠거니 했는데 후에 한일의정서 체결 반대와 보성학교 설립을 보고 애국자임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성향을 봐서는 복벽주의이지만 그래도 민족반역자같은 선택을 하지 않고 애국 운동한 것에 경의를 표한다.

이미지 출처: MODU, 고려대학교에 가다

 

512: 엄주익의 양정의숙, 진명여학교, 숙명여학교 설립

1117: 을사조약 체결

1130: 민영환 자결

 

1907

210: 대구동인병원(후에 경북대학교병원)

2: 대구 국채보상운동

522: 이완용 내각 성립

624: 헤이그 특사 파견

714: 헤이그 특사 파견된 이준 열사 자결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81: 대한제국군 강제 해산

817: 한반도 최초 사진관

 

 

1908

826: 사립학교령 반포

1218: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

 

1909

712: 기유각서 체결 -> 사법권 박탈

1026: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

 

1910

-조선총독부의 토지 조사 사업

-미국 선교사 룰루 프라이 선생의 이화학당 대학과 설치

-회사령 실시

829: 강제 병합

99: 관립 자혜의원(강원대학교병원) 개원

926: 광주 자혜의원(전남대학교병원) 개원

 

 

일단 대한제국이 멸망하게 만든 0순위는 다름아닌 고종이다. 이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민족 반역자도 정말 이기적이고 때려도 시원찮을 사람이지만.... 생각해보니 왜 이들은 온갖 욕설을 섞으며 비난하는데 고종은 그저 '무능한 왕, 불쌍한 왕'이라 불러야 하는가!

 

고종은 썩은 동아줄이자 무책임한, 무능한, 아집으로 가득 차고 시대에 뒤처진, 황제 놀이를 좋아하는 폐위당한 정치가일 뿐이다. 독립협회에서 입헌군주제로 가자 할 때 덥석 잡고 오케이 했어야지.. 그랬으면 당신이 좋아하는 커피 실컷 마시다 발뻗고 잘 잤을텐데.. 그리도 황제가 되어 권력을 주무르고 싶었나... 어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