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태조 왕건- 골품제를 혁파하게 한 초대 임금
2) 혜종- 왕건이 아직 태봉 궁예왕의 신하일 때 태어났다. 그가 만 6살일 때 아버지가 역성혁명을 일으켜 국가를 세우니, 그는 왕자가 되었다. 그는 왕위에 오른 지 단 2년 만에 붕어하는 비운을 맞았다. 혜종의 아들 흥화군은 정종의 아들인 경춘원군과 함께 광종 연간에 벌어진 숙청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고 딸 경화궁부인은 광종의 아내가 되었다.
출처:SBS 보보경심려
3) 정종- 23살에(헐... 나랑 같은 나인데 얘는 겁나 빨리 직업을 갖네.. 뭣보다 직급이 왕이라니!!) 즉위해 27살에 죽은 청년군주로 강력한 뒷배경을 바탕으로 호족 대숙청을 시작한 임금이다. 당대 강력한 호족이었던 충주의 호족 딸인 신명왕후 유씨의 아들이다. 처가가 후백제의 왕실이었고, 동복 누이인 낙랑공주가 경순왕에게 시집을 갔을 정도로 막강한 집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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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로는 비슷하게 피의 숙청을 한 정종에게는 우호적이었다. 아래에는 정종의 대한 최승로의 평가다. 고려 왕씨가 계속 왕위를 이어나갈 수 있는 힘은 광종이 아니라 정종의 공이라고 평하고 있다. 비록 요절하고 무리한 서경 천도를 벌여 민심의 이반을 불러오기는 했지만 보통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물론 정종이 재위 후 미신을 믿어 무리수를 뒀다고 비판도 했다.
4)광종
용모가 상당히 수려하였다고 하며, 키 역시 상당히 훤칠한 편으로 약 188cm였다고 한다.
본격적인 국가 고려로 탈바꿈된 것은 온전히 광종이 이뤄낸 빛나는 업적이었다.
집권 초반부에는 호족 세력들과의 융화를 추구하는 행보를 보이다가 중반부부터는 노비안검법, 과거 제도 시행, 고려의 변두리로 취급받았던 세력들을 중용하는 등의 방법들을 통하여 중앙 집권 정책들을 밀어붙였는데 심하게 공포의 시대로 만들어버렸다.
출처: SBS
최승로 등의 공신들의 후손, 유학자들은 비판적인 시각으로 본다. 시무 28조에서 지적하는 고려 사회의 폐단은 광종의 폐단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
황보연화는 광종의 정실부인이다.(그나저나 강한나씨 너무 예쁨... 하.... 드라마 볼 때 넋놓고 봤다. 또륵) 그런데 그녀의 엄마가 황후 황보씨인데, 태조가 승하한 후 40년 동안 고려 왕실의 웃어른이었던 그녀는 효덕태자와 성종, 경장태자 등을 직접 양육하였으며 후손들의 양육에 관심을 많이 두고 애정을 쏟았다고 한다. 성종조에 남긴 조문에 따르면 그녀는 덕이 많고 성격이 후덕했으며, 검소하고 슬기로워 백관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고 한다.
5)경종- 광종의 장남이자 공인된 후계자였다. 20살에 즉위해 26살에 요절한 청년 군주였다. 전시과를 실행하여 관료들의 급여 체제를 확립시켰는데 이는 조선 시대까지 쓰이게 될 정도로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말년에는 주색과 바둑에만 몰두하며 정사를 돌보는 것을 소홀히 했다.
자신에게 후계자가 있었음에도 나이가 어려서 왕위 계승 분쟁을 우려한 것인지 사촌이자 매부인 성종에게 왕위를 넘겨줬다.
6)성종
*대종 왕욱의 자식들은 성종, 헌애왕후, 헌정왕후이다.
대종 왕욱(아.. 달의연인에서 솔직히 초반에 해수♡왕욱 커플 응원했는데 꺼이꺼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할머니인 황보씨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어쨌거나 왕이 되었는데 재위 후 학자 출신의 최승로를 등용해 그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였다. 서경 장락궁에 가 경종의 아들 왕송을 자신의 후계자로 공인하였다. 이 때 자신의 태자나 정윤으로 봉하지 않고 자신의 군호를 물려주는 특이한 방식을 썼다.
시무 28조를 통한 개혁이 무효가 된 사건도 있다. 거란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는 불교를 사랑하는 지방 호족의 도움이 필요했다. 결국 성종은 이를 받아들여 지방세력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였고, 토풍파의 당수인 서희가 소손녕과의 강화를 이끌어내 강동 6주를 획득하며 위기를 넘기지만, 이로 인해 팔관회와 연등회가 복구되고, 지방세력의 존재를 인정한 주현-속현 체제가 고려 멸망 때까지 유지된다.
유명한 인물- 서희
(요때부터 이천 서씨가 문벌귀족으로 가려는 조짐이 보인다!!)
7)목종
5대왕 경종의 아들이다.
목종은 고려 왕사에서 1번째로 시해당한 군주이다. 꾸준히 인재를 등용하여 최충, 주인걸, 강주재 등을 등용하였다. 그러나 나름대로 정치를 잘 해나가던 목종의 불행은 섭정을 맡은 그의 어머니 천추태후가 초래했다. 그녀는 목종의 나이가 찼음에도 권력을 장악하고, 가짜 승려 김치양과 관계를 맺는 등 목종에게 스트레스를 주었다. 그는 유행간과 남색 관계를 맺고 그를 권신으로 키워 국정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한편 그 당시에 제주도 한라산이 분화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8)현종
현종의 아버지는 왕건의 아들 중 하나인 왕욱(보보경심려에서는 백아)이다.
현종의 어머니는 경종(광종의 아들)의 4비 헌정왕후(왕욱의 딸)이다.
왕족이었지만 사생아 출신이였기 때문에 온갖 암살 위협에 시달리며 절에 숨어살다 왕이 된 입지전적스런 인물이다. 또한 국가사적으로는 당대의 위인 강감찬, 양규 등과 함께 내우외환의 위기에서 고려를 구하고 동아시아 굴지의 강국으로 부상시킨 구국영웅이자, 이후 자신의 후손들까지 이어지는 고려의 전성기를 연 성군이다.
또한 거란의 침입을 부처의 법력으로 이겨내려고 만든 것이 『대장경』(일명 초조대장경)이다.
그리고 광종 때 벼락을 맞아 무너졌던 경주시의 황룡사 9층 목탑을 현종 때 다시 세우기도 했는데 이 역시 불교의 진흥으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태조 왕건처럼 정략 결혼을 많이 하였다.
그 중에서 두 가문이 눈여겨 볼 만하다.
안산 김씨: 김은부, 원성태후, 원혜태후, 원평왕후 (원성태후와 원혜왕후가 낳은 아들이 각각 덕종과 문종이 된다.)
이천 서씨: 원목왕후
9)덕종
11월에 거란으로의 사신 파견을 중단하는 한편 흥종에게 사대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전황제 요성종의 연호인 '태평(太平)'을 계속 사용하는 등 강경 일변도를 유지했다. 거란 흥종이 사용한 연호는 경복(景福)과 중희(重熙)였는데 이 해의 연호는 경복이었다. 1032년 1월 또 다시 거란이 사신을 보냈지만 그냥 무시했다. 아버지 현종 대부터 점차 타국에 품계를 내리거나 책력의 반포, 조공 무역을 늘려가기 시작했다. 이어서 즉위한 덕종 대부터 고려는 가히 동북아의 강국으로 명성이 퍼졌을 정도로 강성한 국력을 자랑하게 된다. 짧은 고려사 덕종 세가 내용의 절반은 타국이 조공하러 오는 것일 정도. 한편 덕종은 고려 역사상 처음으로 국자감시를 시행하여 폭넓은 인재 등용의 체계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렇듯 어린 나이에 아버지 현종의 뒤를 이어 고려의 태평성대를 잘 이끌어 나갔지만 불행하게도 몸이 병약했다.
10)정종
덕종의 둘째 동생이다. 거란의 전쟁 협박에 정종은 물러서지 않았고 오히려 거란의 침입을 대비해 그해 서북로에 장성을 쌓고 군사들에게 토지를 지급하여 사기를 진작시키는 등 국방력 강화에도 힘을 썼다. 실제 1037년 10월 거란이 해군을 동원해 압록강을 침범하여 공격했지만 오히려 고려 정부는 자신감을 내비쳤고 결국 거란의 해군을 동원한 침입은 아무 성과도 없이 끝나게 되었다. 이후 거란 측에서 장성에 대한 언급을 포기하자 12월 정종도 외교력을 발휘해 거란과의 국교를 다시 정상화하고 관계 회복을 시도한다. 다만 국방 정책은 유지해 1044년에 천리장성을 완성시켰으며 예성강의 병선 180척으로 군수 물자를 운반하여 서북계 주진의 창고에 보관하게 하는 등 힘을 기울였다.
동번 여진, 서번 여진, 탐라, 왜 등에게 사실상 조공을 받는 등 위상을 뽐내기 시작하는데 이런 고려의 관례가 정종 때부터 시작되었다.
성종 때 중추원을 제안한 문신 한언공(고구려계 계통)의 딸들과 맺은 최초의 비왕실 결혼이었다.
11)문종
덕종의 셋째 동생이다. 즉위하자마자 문하시중 최충에게 명하여 율령(律令), 서산(書算)을 정리하도록 명하였으며 불교를 증흥시키고 치세 기간 측신인 이자연과 최충을 중용하였다. 재위 3년째인 1049년에 현직 귀족들에게만 토지를 내렸고 공음전을 지급하는 공음전시법(功蔭田柴法)이 전면적으로 시행되었다. 고려의 국력이 정점에 달했던 황금기답게 국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해 비록 요나라(거란)와 송나라의 연호를 쓰고 그들을 상국으로 대하긴 했지만, 고려도 나름대로 자존심을 내세울 수 있었고 요와 송도 고려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배우자 5명 중 3명이 태후, 현비인 경원 이씨이다. 이때부터 이씨 가문의 야욕(?)이 스멀스멀 들어온다.
*경원 이씨: 이자연, 이자겸, 이자의, 인예태후, 사숙태후 문경태후, 연덕궁주, 복창원주
12)순종
요절했다. 3개월 재위.
13)선종
고려의 황금기를 이끈 명군 문종의 차남이다. 부왕 문종의 재주를 닮아서인지 재위 기간 내내 출중한 능력을 바탕으로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해 고려의 황금기를 유지시킨 명군이다.
14)헌종
그는 무척 영특했지만 어린 소년에 병약한 것이 흠이었다고 한다. 껍데기 왕으로서 수렴청정, 쿠데타가 있었다.
15)숙종
숙종은 보위에 오른 조카를 반 강제로 내쫓고 권좌를 차지했으나 유교적인 부자 상속보다는 전통적인 형제 상속이 선호되었던 당시 고려시대에는 큰 비판을 받지 않았다. 동생인 대각국사 의천의 주장대로 주전도감을 설립하여 화폐인 해동통보, 삼한통보를 제조해 유통을 시도하는 한편 절도 많이 지어 불교 세력에 더 힘을 실어주었다. 1105년, 탐라국을 탐라군으로 개칭하여 제주도를 중앙 행정 조직으로 편입시켰다. 한편 재위 말년에 들어 여진과의 전투에서 큰 코를 다쳐 여진족에 대한 정벌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도 했다. 이에 윤관을 기용해 별무반을 양성하며 여진과의 전면전에 철저히 대비했다.
왕비 1명(정주 유씨)만 두었다.
16) 예종
문종과 더불어 무관 대접을 잘 했던 군주이다. 의약 부문을 담당하는 혜민국(惠民局)을 설치하는 등 민생에도 신경을 썼다. 현종 이후 고려 왕조의 최전성기를 이끈 마지막 군주로 예종은 예술에 조예가 깊어 1120년, 서경 장락궁에 행차해 팔관회를 열고 향가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어 문학적 소양을 나타냈다. 윤관을 시켜 동북 9성을 쌓았다.
배우자 중 문경태후(경원이씨)를 두었다.
17)인종
외할아버지인 이자겸의 힘을 빌려 왕위에 오른 것으로 유력하게 추정해볼 수 있다. 고려는 이에 대해 한동안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듬해인 1126년 조정 회의에서 금나라와의 관계 설정 문제를 논의했다. 이어 4월 인종은 정응문 등을 금나라에 보내 자신을 신(臣)이라고 칭하는 등 금나라와 사대의 예로 국교를 맺게 되었다.
경원 이씨 2명을 폐위시켰다.
Q. 이자겸이 누구야
대표적인 외척가문인 인주이씨 가문의 이자겸(李資謙, ? ~1126)은 왕좌를 찬탈할 야망까지 품을 만큼 그 권세가 하늘을 찔렀다.
Q 2. 이자겸이 왜 난을 일으켰을까
처음에는 인종이 이자겸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인종이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실패로 돌아갔다. 한편, 이자겸은 척준경과 함께 반격으로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실패했고, 이자겸은 난을 척준경에게 모두 돌려 그는 화가 나게 되었다. 이 때, 인종은 이를 빌미로 척준경에게 이자겸을 포위하게 하도록 하였고, 결극 이자겸은 유배를 가게 된다.
-> 나의 뇌피셜에 따르면 이자겸이 난을 일으킨 것 같지 않다는 것에 동의하고 싶다. (역사저널 그날 128회에서 이자겸이 정말로 난을 일으켰을까?에 대해 토론하는 장면을 보다가 문득 생각났다) 왜냐하면 이자겸은 물론 왕실에 자기 가문을 많이 배출한 것과 권력이 컸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는 왕이 되고 싶다기 보다는 왕실 근친혼을 계속하게 하여 자기 가문의 권력을 독점적으로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오히려 인종과 장흥 임씨, 경주 김씨의 세력 싸움이라고 보는게 맞는 것 같다. 그리고 경기도 원주에 있는 왕왕왕...자(?) 거북이상은 자기 가문을 모두 왕실로 만들어버리겠다 그런 야망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임씨와 김씨 가문에 의해 그의 꿈은 날아가고 만다. 실제로 이자겸과 왕비 이씨 2명이 폐위하는 과정 중에 장흥 임씨를 왕후로 세우고 이자겸의 난이 발생하고 1년 뒤에 경주 김씨인 선평왕후가 들어오게 된다.
18)의종
현종 이후 지속되어 온 고려 왕조 황금기에 종말을 고한 암군이자 무신정변으로 인해 폐위되어 끔찍한 최후를 맞은 임금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의민의 등 뼈 꺾기에 온몸의 뼈가 부러져 사망했고, 그 시신을 담요로 감싸고 가마솥 2개를 합쳐서 연못 속으로 던져졌으며, 이후 지나가던 스님이 발견하긴 하나 가마솥만 가져가고, 시체는 걍 버려뒀다.
의종 특징: 유교 배척, 불교와 도교 숭상
19)명종
1177년엔 망이 망소이의 난이 일어난다. 역시 제대로 진압이 안돼 군사를 파견한다. 이후 최충헌은 명종의 막내동생인 평량공 왕민을 새 왕으로 옹립한다. 이렇게 우중충했던 명종의 시대가 끝난다.
여기서 명종은 3대 집권자 경대승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이의방에 의해, 무신들에 의해 집권이 된 왕으로서 자신의 왕위를 오래 유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참고로 이의방의 아들 이린은 이성계의 선조가 되며 태자비와 결혼했다.
정중부는 물론 한 때 의종이 총애했던 종3품이었으나 행동과 품위가 굉장히 th으레기였다.
경대승은 무신의 금수저(자기의 아버지가 꽤 높은 관직이었음)인 만큼 문신에게 호의적이고 복고를 주장했으나 권력에 취함 + 무신들의 지지 유지 등에 의해 자신의 꿈을 접게 되었다. 그리고 병사로 사망했다.
20)신종
딱히 평가할 건덕지도 없다. 그냥 최충헌의 허수아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21)희종
재위 초반에는 이렇듯 최충헌의 말을 잘 듣는 군주로 보였으나, 속으로는 최충헌의 전횡을 고까워하고 최충헌을 치려 하고 있었다. 개혁을 추진하려고 의욕적으로 움직인 것은 좋았으나 단지 그뿐, 결국 실패했다. 대체로 왕의 명분이 아무리 좋아도 명분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실리를 놓치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왕이었다는 점에서는 한계점을 드러냈다.
22)강종
무신정권 탓에 여러모로 안습한 삶을 살아야 했던 불운한 임금. 그러나 고려 왕실의 본격적인 부자 상속이 시작된 때도 강종 때부터이다.
23)고종
고종의 치세는 최씨 일가에게 끌려다니는 굴욕, 몽골과의 전쟁 이 두 가지로 표현된다. 이 때의 유일한 업적이 있다면, 이 시기에 팔만대장경을 조판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비용은 최우가 댔다. 사실 뭘 하려고 했어도 최씨 세력이 정권을 잡고 있어서 할 수 있는게 없긴 했다.
24)원종
원종 치세는 치욕이라면 치욕일 수도 있는 '원 간섭기'를 연 시대이다.
25)충렬왕
어머니가 6대 무신 집권자 최우의 외손녀이므로 최씨 정권의 혈통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원나라 공주와 혼인한 고려의 첫 국왕이다. 동녕부, 탐라총관부를 회복하였다.
26)충선왕
고려의 왕인데도 원나라에서 살았던 기간이 고려에서 살았던 기간보다 훨씬 길고 특히 2차례에 걸친 재위 기간 동안에는 겨우 1년 정도만 고려에 있었다. 하여튼 여러 가지로 정말 드라마틱한 삶을 산 임금.
27)충숙왕
고려의 왕 중에서도 생물학적으로 몽골인과 가까워 가장 고려 혈통이 희미한 사람이다. 그러나 고려말을 못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일 정도로 주로 원나라에서 살던 아버지 충선왕과는 달리 고려에 머물며 통치를 했고 자신이 고려인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8)충혜왕
한국이든 중국이든 시호에 은혜 혜 자가 들어간 군주는 심각하게 무능했거나 사이코패스였거나 적어도 둘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하다. 한반도의 개막장 사이코왕. 결국 이를 보다 못한 환관 고용보와 기황후의 오빠이자 부원배 중 원탑을 달리던 기철이 원나라 황제에 청을 넣어, 원나라가 사신을 파견해 충혜왕을 호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둘이 한국사 탑클래스를 달리는 유명한 간신배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행동을 취했다는 것은, 충혜왕의 막장성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알 수 있는데, 사실 간신배라고 해도 어쨌든 국가 통치의 임무를 맡은 만큼 권력을 유지하려면 왕이 그냥 무능하기만 해야지 사람이기를 완전히 포기해서는 곤란했다.
29)충목왕
임금의 자리에 올랐지만 나이가 어려서 모후인 덕녕공주가 섭정을 펼쳤다. 그래도 충혜왕 대에 조성된 정치적 폐단들을 시정하는데 힘 썼고 정치도감을 설치하여 권문세족들로 인해 유명무실해진 토지 제도를 개혁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흑사병으로 요절했다.
30)충정왕
선왕이었던 충목왕이 영리했다고는하나 연달아 어린 임금이 즉위한 나머지 충목왕 말기부터 환관과 외척의 전횡이 심해졌고 특히 기황후의 오빠 기철 일파의 전횡이 매우 심각했다. 더군다나 더 큰 문제는 안으로만 혼잡한 것이 아니라 외적으로도 꽤 어지러웠다는 것.
31)공민왕
원 간섭기의 왕족들이 거의 그렇듯 공민왕도 원나라에서 10년간 볼모 생활을 한다. 이를 "뚤루게"라고 부른다. 일종의 인질 형식으로 피지배 지역의 왕족들을 원나라 수도 대도에 머물게 하면서 정치 자문 등의 역할을 하게 한 제도로서 이들은 황제의 최측근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한편 전민변정도감을 세워 기철 일당이 점탈했던 인구와 토지를 재빠르게 정리했으며, 성리학을 공부한 신진사대부라는 새로운 지식인 계층을 등용 및 육성하면서 제법 의욕적인 개혁 정책을 펼쳐 나갔다. 성적 면에서도 스스로를 절제했으며, 신하들에게도 예의를 갖추었다. 쌍성총관부를 무력 수복하였다.
32)우왕
공민왕이 홍륜에게 시해당한 후 갑자기 왕이 된 그는 재위 기간 동안 국정을 이인임 등 권문세족과 최영에게 맡긴채 궁에서 음주가무를 즐기며 향락에 빠져 지냈다.
33)창왕
부왕인 우왕이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손에 넣은 이성계 암살 시도 등으로 폐위당하자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 허수아비 임금.
34)공양왕
창왕이 폐위되자 이성계 일파에 의해 옹립됐다. 바보짓도 하고 정치적 야심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별짓을 다했지만 이성계 일파는 그를 무혈 선위의 도구로 사용했다. 본색을 드러내고 정몽주와 마지막으로 반전을 노렸지만 무위로 그쳤고 용도가 다한 그는 유배 후 사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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