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

1880~1885년, 뒤늦은 개항과 영향

정알못 2021. 2. 22. 21:38

1880년 3월: 김홍집 수신사 임명

          7월 6일~8월 28일: 2차 수신사의 도쿄 방문 및 귀국 -> 이 때 조선책략을 가져온다. 

(3개월후)10월 1일: 병조정랑 유원식, 상소 올리다가 평안도 철산부로 유배되다. 

    (음력)12월 21일: 통리기무아문 설치

 

1881년 1월 11일: 조사시찰단 파견(조병호 등) why? 강화도 조약의 무관세 문제 때문에

          2월 26일: 이만손 등 영남만인소

          5월: 별기군 창설 

          9월 26일: 영선사 파견(청나라에 파견함)

     

 *개인적인 의문점: 아니, 개항하는 것 까지는 좋은데 도대체 왜 기존의 군인들의 월급을 삭감하면서까지 일을 진행했을까? 

옛 말에,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면 가랑이가 찢어진다"가 있다.

이미지 출처: m.yesm.kr/news/articleView.html?idxno=44482

다른 주변나라보다 훨씬 늦게 개항을 하는 바람에 열강들간의 격차가 어마어마했다.

 

힘이 약했던 이 조선은 이렇게밖에 살아남을 수 없었던 걸까. 

부국강병은 이 시기에는 애초에 바라기도 힘든 상황이다. 성리학, 지식계층의 비유동성, 외세의 침입에 대비를 하지 못한 것까지. (임진왜란 때부터 부국강병은 꿈꾸지 말았어야 했음. 이순신 장군께서 역병을 앓으면서까지 지켰는데..에휴)

 

그러나 열강에 의한 나라 멸망까지 가게 하는 것은 무엇이 결정적이었을까. 을사늑약은 원인이라기보단 결과의 증표라 생각이 든다. 

 

역사저널 그날을 보다가 홍경래의 난에 대해 다룬 부분을 보았는데, 이것이 세도정치의 신호탄이라고 한다.

평안도는 성리학이 타 지역보다 덜 중요시되었고, 청나라와의 교류가 활발하여 꽤 부유한 곳이었다. 조정에서는 예뻐해주지도 못할망정 차별이나 하고 있으니... 성리학이 그리도 중요하던가?

홍경래의 난

이미지 출처: 우리역사넷 (history.go.kr)

홍경래의 난은 주최자가 평민 출신이고, 그의 밑에 여러 계층이 따랐다. 그러나 부족한 군사 실력으로 실패하였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멸망에 대해 설명하기가 조금 부족한 듯 하다. 

 

바로 정조의 통상수교 거부정책이 멸망의 큰 시초라 생각이 든다.

물론 정조는 애민군주이다. 정약용 등의 인재를 발굴한 것, 탕평책을 실시한 것, 전염병을 퇴치하려고 노력한 것까지 모두 인정하고 싶다. 

그러나 그는 국외정세는 정말 문외했다. 철기시대, 하다못해 중세국가라면 어느정도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그 당시 국제 정세는 산업혁명 이후 제국주의로 빠르게 물들고 있었다. 정조 15년차에는 경연을 아예 하지 않았다. (경연 폐지 및 초계문신제 실시)

게다가 일본 수신사 파견도 하지 않으니 바깥으로 보려는 눈과 귀는 닫아버린 것이다.

조선 국왕 정조

정조의 시기를 쪼개자.

15년차 전의 정조와 15년차 이후의 정조.

 

15년까지만 해도 그의 업적 덕분에 희망이 보였다.

그러나 15년차 이후 세상의 눈과 귀를 꽉 닫아버렸다. 

상당히 똑똑했던 왕이었는데, 왜 다른 나라를 살펴보려고 하지 못한 걸까. 

공자의 명언 중 하나

성리학의 나라를 다스린 정조가 유교의 기본적인 것을 살펴보지 못하였다. 참 아이러니하면서도 안타깝고 씁쓸하다. 

 

 

식민지를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 태국을 통해 조선 후기 멸망테크과 비교해보자. 

1855년 보링 조약으로 영국에게 자유 무역항을 승인하고 영국인들에게 치외법권을 인정하였으나 프랑스와 영국 사이를 오가는 그네타기 외교에 성공함으로써 식민지의 경험을 피할 수 있었다.

 라마 6세는 1914년 중립을 선포하고 전쟁이 종반에 이를 때까지 계속 중립입장을 고수하였다. 1917년 미국이 대독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국 측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라마 6세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대하여 선전포고하였다. 이와 같은 형식적인 참전이 태국에게 막대한 이익을 가져왔다. 파리 강화 회의(1919년)가 열렸을 때 태국은 전승국의 입장으로 참가하고 국제 연맹의 창설과 함께 정회원국이 되어(1920년) 불평등조약을 갱신하는 계기가 되었다.(출처: 위키백과)

 

태국의 경우 라마 1세(조선시대 정조랑 비슷한 시기에 재위했음)까지는 영토 확장 등으로 잘나가는 시기였다. 그러나 라마 2~4세 왕은 이 두 왕은 서구 열강의 침략열기 속에서 베트남을 더욱 경계해 쓸데없는 싸움만 지속했고, 후임 라마 4세는 영국의 공세에 시달리다 치외법권과 관세 인하를 인정하는 등, 이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제국주의랑 마주했다.(출처: 나무위키)

라마 5세 쭐랄롱꼰 대왕은 파격적인 정치를 하였다.

-노예제 폐지(1905년) <-> 조선은 갑오개혁으로 1894년 신분제 폐지

-교통망, 법 선진화 <-> 조선 독립협회 1896~1899 노력 vs 고종의 압박

-문화 선진화 <-> 조선 동도서기론 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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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건 연대기로 돌아가서,

 

1882년 5월 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6월 9일: 임오년의 대규모 폭동 why? 구식군인에게 제대로 월급도 주지 않고 신식 군인과 차별을 하였음.

          7월 13일: 청+민씨의 흥선 대원군 납치 

          7월 19일: 임오군란 종료

          8월 23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제물포 조약(임오군란으로 인한 배상 요구) 체결 

         11월 17일~18일: 통리아문 신설 (추후 통리기무아문에 필요한 것들 추가 신설됨)

 

1883년 7월 15일: 보빙사 파견

         7월 25일: 조일 통상 장정 (관세 부과, 최혜국 대우) -> 1881년의 조사시찰단 주요 내용 해결 완료

                                                                          -> 청일 전쟁의 주요 원인

         10월 31일: 박문국 설치 및 한성순보 발간 

         11월 26일: 조영통상조약, 조독 수호 통상조약 체결

 

1884년 4월 22일: 우정총국 설립

          7월 7일: 조러 수호 통상 조약

1884년 10월: 우정총국 낙성 축하연 -> 갑신정변

 

 

1885년 1월 9일: 한성조약 체결(갑신정변 보상)

          4월 15일: 영국의 거문도 점령

         8월 3일: 배재학당(미국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