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

민족주의의 정도에 따른 조선 실학과 역사

정알못 2021. 2. 18. 00:38

(1) 유수원(성리학 패시브+실학)

-> 상공업을 하는 선비를 꿈꾼 사람.

-영조의 총애를 받은 신하(1694년 출생)

-경종 3(1723) 7월에 낭천현감으로 좌천되었다.

-영조 13(1737) 10, 비국 당상 이종성이 영조에게 유수원을 천거했다.

[시대 상황]

경종: 대리 청정 논란으로 노론 측 인사 대거 숙청

세자 시절 양전 사업 강행.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밝혀 놓은 책 발간

 

영조: 탕평책

 

-양천제의 이원적 신분제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본 것이다.

-정작 노예제를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엄격히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이 부분은 꼰대..)

-사농공상의 직업적 평등과 전문화 주장

양반의 상공업 종사론: 공부 못하는 양반은 농, , 공업 종사하도록 하자. (문자를 아는 상공인)

why? 그때 분위기: 양반도 농업은 하는데 상공업을 천시함.

 

 

 

 

(2) 홍대용(성리학 약간+ 천주교 + 천문학)

-> 전 국민 의무교육을 꿈꾼 천문학자.

이미지 출처: 네이버 웹툰 왕세자 입학도 41

(출처: 위키백과)

-연암 박지원과 온갖 학문적 교류를 나누었다.

-조카사위 : 은신군, 사도세자의 서자, 흥선대원군의 양할아버지

-조카사위2 : 김노경, 문신·추사 김정희의 양아버지

-1765(조선 영조 41) 35세 때 숙부인 홍억(洪檍)이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갈 때 군관(軍官)으로 수행

-> 성리, 역사, 풍속, 천문학, 지리학 지식을 쌓음.

-> 독일인 출신의 청나라 사신과 고가이슬 등과 만나 천주교, 천문학 등을 공부함.

-특히 공거제(貢擧制) 8세 이상의 모든 아동을 차별 없이 교육시켜야 한다는 개혁 주장.

 

그 외

박지원: 생산과 유통이 중요하다. 수레, 선박, 화폐의 필요성. 양반 비판.

박제가: 청의 문물 적극 수용. 수레 선박의 확대, 소비 촉진

 

(3) 안정복(성리학 패시브 + 순혈 민족주의)

-> 민족주의 역사관을 토대로 국방을 중요시한 (조선 관점에서는) 보수

 

- 광주 안씨의 시조는 고려 때 태조를 도와 공을 세운 안방걸(安邦傑), 광주는 태조에게 받은 사패지(賜牌地: 임금이 내려준 논밭)이다.

-조선 후기 광주부: 실학의 종장(宗匠)인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의 영향을 받은 순암 안정복,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등 재야 남인 계열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실학이 형성된 지역이다.

-35세에 안산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을 찾아가 그의 문하에 들어갔다.

-천주교를 비판하였는데 사후 순조 원년에는 천주교 비판의 공이 높이 평가되어 정2품 벼슬에 추증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익의 제자로서 천주교를 믿었던 남인 학자들은 사형을 당했다.

-일제강점기에 위당 정인보(鄭寅普, 1893~1950)나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0~1936) 등이 가졌던 민족주의 역사관도 안정복의 영향을 받았다.

-단군조선을 우리 역사로 인정한 [동사강목]은 단군의 정통성이 기자-마한-통일신라-고려로 이어진다고 서술하였다. 이어 단군ㆍ기자ㆍ위만을 합하여 삼조선(三朝鮮)라고 한 [동국통감]의 역사 체계를 비판하고, 위만은 나라를 찬탈한 도적이므로 삭제한다고 기술하였다.

(개인적인 생각: 동국통감의 기자 조선을 비판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증거가 없는데 명나라랑 이을 건덕지 때문에 만든 허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근데 위만 조선은 글쎄...? 위만왕 본인이 상투 하고 기존 고조선의 체제를 따르는데, 다른 민족이라고 우리 역사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순혈주의 아닌가. )

 

-을지문덕과 강감찬 등 외래 침략을 격퇴한 명장들의 업적을 찬양하고, 국방 문제나 백성들을 위한 개혁안 등에도 많은 관심을 두고 서술하였다. (조선 국방 디스)

[네이버 지식백과] 안정복 [安鼎福] - 자국의 역사를 체계화한 보수주의 실학자 (인물한국사, 정성희, 장선환)

 

(4) 이종휘(성리학 패시브+ 순혈 민족주의)

특히 주자 성리학의 전통적인 역사 인식에서 기자조선을 높게 평가한 것과 달리, 이종휘는 단군조선의 의미를 높게 평가하였다. 한국사의 뿌리는 단군조선으로서, 비록 단군조선이 기자조선에 의해 멸망되었지만, 단군의 후손들이 부여, 예맥, 비류, 옥저 등을 건국하였고, 부여의 후예가 고구려와 백제를 건국하였으므로, 결국 단군의 혈통임을 강조하였다.

 

이종휘는 기자조선의 의미도 문화적 측면에서 높게 평가하였다. 기자를 통해 중국의 문화가 유입됨으로써 조선이 소중화(小中華)로서 문화 국가가 될 수 있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사대주의 성리학자들의 역사관과 달리 이종휘는 기자불신설(箕子不臣說), 즉 상나라 왕족인 기자가 주나라 무왕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중국사에 예속되지 않는 조선사의 독자적 의미를 강조하였다.

(아놔... 왤케 순혈 민족주의가 많은거야. 기자 조선도 존재했다고 생각하고. 다만 위키백과 말대로 기자 조선과 주나라는 다름을 강조한 것은 사대주의보다 나은 건 인정.)

 

(5) 유득공

그는 최초로 발해사에 관심을 갖고, 발해사가 고구려의 유민들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점을 주목하였다. 그는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자로 봤고,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이를 조선 역사의 체계 안에 포함시켜야 함을 주장했다. 또한 기존의 통일신라설에 이의를 제기하고 신라와 발해가 병존했던 시기를 남북국 시대(南北國時代)로 규정했다.

 

(6) 이긍익(성리학 패시브+ 순혈 민족주의)

이긍익의 역사의식은 연려실기술을 통해 살필 수 있다. 이긍익은 고증을 역사에서 제일의 생명으로 여기고, 어디까지나 술이부작(述而不作)’·‘불편부당(不偏不黨)’의 정신으로 남인·북인·노론·소론 및 유명·무명 인사를 가리지 않고 자료들을 섭렵, 인용했으며, 거의 국내 자료에 국한하였다. 이것은 한치윤(韓致奫)해동역사를 쓸 때 외국 자료를 통해 한국사를 이해하려 한 태도와는 대조된다. 우리의 역사는 내 나라의 자료로써 이루어져야 한다는 강한 자아의식 때문이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긍익(李肯翊))]

 

(7) 한치윤(성리학 약간 + 민족주의)

그는 일생 동안 젊어서는 시문으로 이름을 떨쳤고, 중년에는 북경을 찾아서 견문을 넓혔으며, 만년에는 한국사의 객관적인 편찬물을 이룩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와 같이, 그는 한국사학사에서 높이 평가될 수 있는 해동역사의 저자라고 하는 위치에서만이 아니라,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서 우리 나라의 문화사적 측면에서도 도외시될 수 없는 인물이다. 그가 전통적인 학문과 덕행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학문적인 분야를 개척하고 이를 위한 색다른 업적을 쌓아올린 성과는 당시의 학문적·사상적인 상황을 이해하는 데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치윤(韓致奫))]

 

Q. 만약 내가 역사학자라면 이긍익처럼 국내 자료에 국한하여 작성할 것인가, 아니면 한치윤처럼 해외 자료도 참고하여 작성할 것인가?

이긍익이 물론 탕평 정신을 가지고 국내 모든 자료를 섭렵한 것은 높게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나는 한치윤처럼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오늘날 역사학자의 덕목이라 생각한다. 나는 조선이 멸망한 이유가 일단 0순위는 성리학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두 번째로는 국방, 세 번째는 객관성의 결여라 믿는다. 최근 국뽕 영상 같은 것을 보면서 참 많이 느낀다. 국뽕 영상을 보면 한국은 뭐 우주 최강 잘나가고 뭐만 하면 다른 나라가 놀라고 경악하고 그런다는데 실상 해외에 나가보면 우리 나라를 모르는 외국인도 있고 잘해봐야 한국과 관련된 경험을 한 외국인만 어느정도 알음알음 아는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