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 이중환
여담으로 이 사람에 대해 찾으려다가 영상에서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헉! ebs 지식 채널에서 봤던 거잖아.’
집안: 아버지-충청도 관찰사와 참판직. 친척- 성호 이익의 재증손(사촌 형제의 손자)
대충 아이돌 피오처럼 금수저다 이말이야~~
성호 이익의 학풍을 물려받아 사회와 인문, 지리학에 관심을 두었다.
1704년(숙종 30년) 강릉부사로 부임한 아버지 이진휴를 따라 강릉에 갔다가 1708년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음서로 관직에 올라 통덕랑(-> 정5품직)이 되었으며, 1710년 부친상을 당한 뒤 과거 시험에 전념하였다.
1722년(경종 2년) 노론 대신들이 세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경종을 제거하고 왕위를 찬탈하려고 모의했다는 목호룡의 고변이 있었다. 이때 그는 장인인 목일임(睦林一, 경남 사천)의 친족인 목호룡에게 말을 빌려주었다가 후에 옥사에 연루된다. 절도로 유배형을 받았다가, 1727년 풀려나왔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도 정치참여의 자격이 박탈돼 전국을 유랑하며 지내야 했다.
...헐... 음서 3년, 과거 합격 이후 9년 만에 추방이라니. 하긴 그 때 경종(소론파) -> 영조(노론파)로 정말 노론이 많이 죽었음. 목호룡이 소론파에 1년만에 슬쩍 들어가고 노론이 반역을 일으키고 있어요~~라며 떠벌렸으니. 그러나 줄을 잘못 탔네? 영조 왈, 너넨 죽었어.
그 후 30년간을 전국을 돌아다니며 지리·사회·경제 등을 연구하였다. 성호 이익의 제자로서 그 학풍을 계승하여 인문 지리학의 선구자로 활약하였다. 1751년부터 택리지를 저술하였다.
그는 자신의 저서를 저술하면서 스승이자 재종조부인 이익에게 자문하였고, 이익은 1751년 완성된 그의 책 택리지의 책의 원고를 읽고 나서 내용을 교열, 수정해주고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였으며,택리지의 서문과 발문을 직접 써주기도 했다.
1753년(영조 30년) 특명으로 은전을 받고 통정대부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1756년에 사망하였다.
택리지 저자와 택리지 발문에 참여한 이들의 면면을 볼 때, 근기남인으로 남인 강경파 이중환, 이중환의 친척인 성호 이익, 이중환의 처가 식구들인 목성관, 목회경 등 전부 남인 일색이고, 택리지 발문에 마지막으로 참여한 이 역시 남인 정약용으로 성호 이익을 사숙(私淑)하며 그의 영향을 받은 점을 볼 때 택리지가 정치색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볼 수 없고, 그래서인지 남인 지지기반인 영남에 대하여 호의적인 평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중환, 이익, 정약용의 글들에서 유사한 점이 보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출처: 나무위키)
(2) 정상기
그는 어려서부터 고상(高尙)한 마음과 뜻을 가지고 원대한 포부로 학문에 매진하였으며 반드시 옛 성현(聖賢)들과 같이 학문을 깊고 원대하게 탐구할 것을 마음속에 스스로 기약하고 조용히 들어 앉아 많은 책을 읽었다. 뒤늦게 자신보다 3년 연하인 성호 이익(星湖李瀷)에게 가르침을 청해 그의 문인이 된다. 이익을 통해 농포는 퇴계 이황, 남명 조식에게 뿌리를 둔 남인 성리학과 실학 사상을 수학하였다.
오잉!! 3년 어린 천재 밑에서 배우려고 했다니.. 솔직히 놀랍다. 나는 나보다 어린 친구한테 배우려고 하니 낯부끄러울 것 같다. 나이에 자격지심(그나이 먹도록 뭐했냐...)으로 쪽팔려서 오히려 공부를 안할 것 같은데 이 사람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잠깐! 그러고보니 나이에 따라 깍듯이 대하고 친구 못하고 하는건 도대체 어느 때에 만들어진거야...? 조선시대엔 하물며 어린 사람을 스승으로 여기는데... 오잉?.?
그냥 옛날에도 똥군기 잡는 성리학자가 있고 나이에 상관없이 스승으로 대하는 성리학자가 있는 것이었다.
하... 그냥 또라이 불변의 법칙이 있는데 성리학 때문에 그 특유의 똥군기가 생긴 거구나...^.^
오랫동안 조선을 여행, 8도 전국(全國)을 답사하고 과학적(科學的)인 백리척(百里尺)의 축척법(縮尺法)을 이용하여 팔도도(八道圖)를 도별로 제작해 거기에다 역대의 국경변천역사와 군현(郡縣)의 연혁(沿革)과 관방(關防)의 성곽(城郭) 해로(海路) 궁실(宮室)등에 대한 변천을 기술했으며 그리고 사람들에게 수행(修行) 섭양(攝養) 근업(勤業)의 3조목을 들어 가르쳤다. (출처: 위키 백과)
*동국지도
전국 8도를 축척의 개념인 백리척을 사용하여 영조 연간에 제작한 지도.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동국지도(東國地圖))]
(3) 김정호
김정호는 지도(地圖)와 지지(地誌)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라고 인식하였다. 지도로써 천하의 형세를 살필 수 있고 지지로써 역대의 제도와 문물을 헤아려 볼 수 있으므로 지도와 지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위국(爲國) 곧 치국(治國)의 대경(大經)이라고 지도와 지지의 관계를 강조하였다.
지도와 지지가 위와 같이 중요함에도 단기(檀箕; 단군과 기자) 이래로 지도가 없고 지지는 《삼국사기》에 이르러 비로소 만들어졌기 때문에 지지의 첫머리에 신라 이전의 사항을 두어 알게 하였다. 조선에 들어서는 초기에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어 비로소 도적(圖籍)이 환연해졌지만, 김정호가 사는 때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편찬된 지 3백여 년이 지나 지리 정보에 차이가 많아졌으므로 이를 바로잡으려고 《동여도지》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편목이나 구성이 《동국여지승람》의 구성과 비슷하다.(출처: 위키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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