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출처: http://www.s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528
오늘날의 단발은 귀엽고 발랄한 무드를 연출하고자 하는 여성에게 인기 있는 머리 모양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여성에게 단발이란 사내를 흉내내는 괴상한 스타일이라 생각했다.
1922년 7월, 기생 강향란에 대해 시사평론은 그녀의 행보에 대해 비판하였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웹툰 ‘정년이’ 15화 중, 다음 웹툰 ‘경성야상곡’ 1화 중
출처: https://www.ynam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948
독립운동가 손병희의 셋째 아내 ‘주옥경’ 같은 경우, 8살 어린 나이에 평양 기생 학교에 다니고 일패 기생이 되었다. 22살 때 가야금, 그림 등의 예술을 하던 모습에 손선생 역시 30여년의 나이 차이는 둘 사이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듯 그저 서화를 통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교감들을 나누게 했다.
산월은 그렇게 기생의 신분에서 벗어나 존경하는 손병희 선생의 아내, 본명의 한자를 새로이 바꿔 '주옥경(朱鈺卿)'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순간이었다.
손병희는 1922년 11월 28일에 뇌일혈로 쓰러진다. 반신불수 상태에서도 수감 생활을 계속 하다가 병세가 극도로 악화된 다음해 10월 22일에야 병보석으로 출옥하게 된다.
29세에 남편을 잃은 주옥경은 그대로 좌절하지 않았다. 1924년 주옥경은 손병희의 딸 손광화 등과 함께 내수단(內修團)이라는 천도교 여성단체를 만들었다. 1922년에 결성된 대한여자기독청년회(YWCA 전신)에 이은 두 번째 여성단체였다. 주옥경은 1927년에 일본으로 유학을 간다. 손병희의 셋째 사위인 소파 방정환의 권고에 의한 것이었다. 도쿄에서도 내수단 도쿄지부를 조직했다.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극복하고 3년 만에 졸업해 귀국할 수 있었다. 주옥경은 신학문을 배워서 내수단을 통한 여성운동에 더욱 앞장섰다.
이렇듯, 1920년대에는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넓어졌다.
그 밖에 여성 운동은 근우회(1927)가 있다.(참고로 신간회의 외곽 단체가 근우회이다)
그런데 근우회에 대해 알아보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근우회의 창립자 중 한명이 김활란인데, 친일파였다. 일제 강점기의 여성 지위는 열악했기에 근우회가 여성에게 큰 힘이 됐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나.. 반민족행위를 했다는 것은 정말 수치스러운 일이다. 심지어 김활란은 자기의 여제자들을 위안부로 보냈다.
모윤숙이 주도하여 설립한 낙랑클럽의 총재를 맡았다는데 문제는 이 낙랑클럽이 겉으로는 여성들의 민간 외교단체라지만 사실상 유사 매춘 그룹이라는 지적이 많다.
김활란은 기독교인이자 여성운동가의 핵심적 인물이고 더욱이 명문 여대의 학장까지 하던 사람이 유사 매춘그룹의 총재를 했다는 어이없는 결론이 나오는 셈.
게다가 낙랑클럽의 여성들이 대부분 이화학당 출신이라는 점에서 더 어처구니가 없어진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의 정신대지원 강요로 인하여 일본군의 성노예라는 지옥에 희생된 제자들에게 단 한마디로 사과하지 않았다. (출처: https://principlesofknowledge.kr/archives/30413)
.... 할 말이 없다. 여권 신장을 위한다는 자가 제자를 위안부에 팔아 보내는 게 무슨 심보인가? 말만 여권이지 사실은 자신의 안위밖에 모르는 민족 반역자였던 것이다.
근우회 초창기 멤버 이력을 요약해보니 다음과 같다.
①유영준: 한국의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여성운동가, 의사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②이현경: 1924년 3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우등 졸업 도쿄여자대학 입학. 기독교단체인 여자청년회 가입 및 삼월회(三月會) 참여. 귀국 후 안광천(安光泉)과 결혼 및 1927년 4월 근우회 창립준비위원. 그 후 남편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
③유각경: 유길준의 조카. YWCA 회장과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 회장,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여전도회 회장을 지내는 동안 일제에 협력한 의혹이 있다. 광복 이후에는 우익 정치 활동에 참여하여 이승만을 지지하였으며, 자유당의 간부를 지내기도 했다.
④최은희: 황해도 연백군에서 태어나 니혼 여자대학 3년 재학 중 《조선일보》 기자가 되었다. 일본 와세다 대학교 법과 통신 강의 2년을 수료.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한국 최초의 여기자이다.
⑤황신덕: 평양의 숭의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했다. 귀국한 뒤로는 《시대일보》, 《중외일보》, 《동아일보》의 기자와 동아일보가 발간하던 여성잡지 《신가정》 기자로 근무했다. 1929년 동아일보의 기자 출신 임봉순과 결혼했다. 한편 1930년 그는 자신의 동성애를 고백하여 화제가 되었다. 2·8 독립 선언과 3·1 운동에 가담하였고 신간회와 근우회에도 활동하였다. 추계예술대학교와 중앙여중, 중앙여고의 설립자이다. 독립운동가 겸 여성운동가 황애덕과 자매간이다. 1930년대 말부터 광복 시점까지 각종 강연과 좌담회, 기고를 통하여 친일 활동을 했다. 일제 강점기 후반에 일본에 협조하였고 제자들을 전장으로 내몰았다는 비판이 있다.
⑥박원희: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철원보통학교의 교사로 3년간 재직하다 일본에 유학하였다. 이때 김사국(金思國)과 결혼한 그녀는 귀국 후 여성운동에 뛰어들어 남편이 주도한 서울청년회계의 청년당대회(靑年黨大會)에 참여하였다.1927년 4월에는 중앙여자청년동맹(中央女子靑年同盟)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청소년 남녀의 인신매매 금지, 만 18세 이하 남녀의 조혼폐지, 청소년 남녀직공의 8시간 이상 노동야업 폐지, 무산아동 및 산모의 무료요양소 설립’ 등을 주장하였다. 5월에는 당시의 여성운동가가 총망라되어 신간회의 자매단체로서 근우회(槿友會)를 조직할 때 창립준비위원으로 참가하여 회원모집의 임무를 맡았다. 이후 교양부의 책임자로 계몽강연을 하며 각 지방을 순회하였다. 아울러 동아일보에 논설 등을 발표하며 여성의 사회 의식 향상을 도모하고,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분규해결에도 힘썼다.
그러나 지나치게 많은 일을 수행하면서 병을 얻은 그녀는 1928년 1월 15일에 3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⑦정칠성: 대한제국의 기녀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에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한 항일 독립 운동가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하였다. 1930년 제2차 경성학생시위사건(일명 근우회사건) 주동 혐의로 투옥당하였다.
반공을 국시로 내건 이승만 정권의 탄압으로 남한에서의 합법적인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남로당계 인사들과 함께 월북했다.
⑧정종명: 일제강점기 근우회 지명 집행위원, 의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간호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정종명(鄭鍾鳴))]
사회주의자, 민족반역자, 자유주의자로 성향이 명확한데 정말 다양하고 과격해서 뭐라 해야될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 당시 여성이라는 이유로 신념이 확고하지 못하면 이리저리 휘둘려질 것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일단 김활란 같은 민족반역자는 거르고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 여성분들 모두 독립을 위해 애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념에 상관없이 자신의 신념과 조국을 위해 애써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도 조선 때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여권이 낮았는데 이렇게 높아진 것은 모두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고군분투가 있어서입니다. (김활란같은 사람들 빼고!!)
남자현은 어떻게 무장 독립운동을 하게 되었을까요? 그녀가 처음부터 비범한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닙니다. 남자현은 1872년 경북 안동 양반가에서 태어나 19살에 혼인하여 평범한 여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1896년 의병에 가담한 남편이 전사하면서 그녀의 인생은 크게 바뀌었습니 다. 그녀는 가장으로서 생계를 책임지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부친이 의병 부대를 조직하자 의병을 모집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활동을 도왔고, 1919년에는 3·1운동에 가담해 독립선언서를 배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아들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해 서로군정서에 가입에 무장독립운동에 참여했습니다. 남자현은 여성의 몸으로 일본의 요인을 처단하는 2번의 거사를 계획하였고, 무토 노부요 시를 처단하는 두 번째 계획을 실행하던 중 일경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체포 당시 그녀는 남편이 전사할 때 입었던 의병 군복을 입고 있었고, 무토를 처단할 권총과 폭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남자현을 여자 안중근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1932년 하얼빈에 국제조사단이 파견되자 남자현은 한국의 강력한 독립의지를 전달하고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고 이를 조사단에 보냈습니다. 여성의 몸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독립의지를 전달하고 권총과 폭탄을 가지고 일본 요인의 처단 계획을 실행했던 남자현. 그녀는 독립은 정신으로 이룬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녀 자신이 누구보다 강인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오늘은 왼쪽 무명지 두 마디와 이별하려고 한다. 어쩌면 내 손을 채웠던 이 작은 것이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할 수도 있겠다 싶구나.”
여성독립운동가 남자현의 꿈이 우리의 독립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독립운동가 남자현이 되어 그녀가 꿈꾸었던 대한민국을 완성해주세요!
남자현의 꿈을 세계 친구들에게 알려주세요!
출처: 독립운동가 남자현의 꿈(1872~1933) – 독립운동가의 꿈 (pr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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