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

통일 신라 궁금증 풀기

정알못 2021. 1. 12. 18:45

통일신라 궁금증

 

도독이 뭐야

-도독(도를 살피는 관직)

-문무왕 때 9주 장관의 명칭으로 도독이 사용되었고, 총관은 전국적인 군사동원의 필요에 따라 임시로 사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 9주 장관의 기능에서 군사적 성격이 배제되고, 단순한 행정적 외관(外官)이 되었음을 나타낸다.

-삼국통일 이전은 군주의 임명기사가 빈번한 것에 비하여, 704(성덕왕 3) 김대문(金大問)의 한산주도독 임명기사 이후 선덕왕대에 이르기까지 100여 년간 임명기사가 누락되어 있는 것을 보면, 신라 중대(中代)에 있어서 도독이 가지는 정치·군사상의 중요성이 그리 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하대(下代)에 들어서면 도독이 강력한 세력자로 재등장하여 군사적 활동을 수행하는 동시에 지방세력과도 결부되어 그 세력이 강화되었다.

하대의 도독 중 주목되는 인물은 김헌창(金憲昌김흔(金昕김양(金陽) 등의 무열왕계 사람들이다.

-신라 말기 문성왕 이후에는 외관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보다 자신의 근무지에서 성주·장군으로 불리는 호족의 입장이 되어 독립된 세력으로 성장, 신라 붕괴의 요인이 되었다. 이에 대해 군주를 일률적으로 주의 장관으로 보지 않고, 그러한 주 역시 재지세력(在地勢力)의 편제과정에서 성립된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도독 [都督]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통일신라 6, 9, 군 현 모르겠어.

-6부는 장관급 애들얘기하는 거구,

9주의 주는 현 대한민국과 고려, 조선의 도와 비슷한 위상의 행정 구역이다.

아무래도 서라벌이 수도였던 만큼 경북에 도를 많이 구분시킨 모양이다.

5소경

5소경

-신라는 통일 이전에 주()와 군()을 형성했지만 현()제는 시행하지 않았었고

-통일 이후에 비로소 현을 운영하게 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 주의 장관은 '군주(軍主)', 군의 장관은 '당주(幢主)'로 불렸던 점이나, 주의 경우엔 고정된 지역을 가지지 않고 이동이 잦았던 점 등을 살펴보면 이들은 행정조직이라기 보단 군사조직에 더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신라 통일 이전에 주·군 아래에는 성(()이 있었던 것이 확인되는데, 이들 가운데 일부는 중앙에서 파견한 도사(道使)라는 책임자가 임명되었던 것이 확인되지만, 일부 촌들은 현지 유력자가 사인(使人)이나 촌주(村主) 등으로 임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 신라기- ()가 고정된 지역과 영역을 갖고, () 아래에는 현이 설치되어 운영되기 시작

- 반면 신라의 군현관계는 군이 현을 통솔하는 역할을 가진 것은 확실해 보이지만, 군은 자신이 위치한 지역에서는 현의 역할을 함께한다는 점이다.

신라 현의 근원을 생각해보자면, 인위적으로 조직한 중국 군현제의 현과는 달리 성(() 단위의 지방의 자생적인 지역공동체들을 재조직한 결과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주···향의 아래에는 '()'이라 지칭된 촌락단위가 별도로 예속되어있었던 것을 본다면, 현이나 향으로 개편된 기존의 성·촌들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취락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변지역의 여러 촌락들을 관할하던 소규모 정치집단들의 중심지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촌락을 기반으로한 별개의 행정단위였다는 점에서는 동격의 지방행정단위였을 것이다. 단지 군사적 조직에서 출발한 주와 군은 소경(小京)과 함께 지방의 주요 중심지에 설치된 중앙 직할의 행정구역이었던 것에 반해, 현은 일부 중요 지점에는 중앙 직할로 관리되어 소수가 파견되고 그렇지 않은 대다수의 현·향은 재지세력의 유력자가 임명되는 점에서 차이가 있어, 주와 군에는 보다 군사적 권한이 강한 성격의 관제가 마련되어있고 이들이 예하의 현·향의 동향을 감시·감독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으며, 중앙 정부에서는 이러한 군사적 권한을 가진 주·군을 통제하기 위해 이곳에만 외사정(外司正)을 파견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출처] 신라의 주((((()에 대한 단상|작성자 지국

 

3. 신라는 탐라국 언제 속국으로 함?

-한반도 국가와 직접적으로 통교한 것은 백제의 웅진 남하 시기 이하로 추정한다

-삼국사기나 일본서기 등의 기록에서도 백제의 전남, 제주 등의 남방 진출은 5세기 말이나 6세기 초 이후로 해석할 수 있다.

- 동성왕대를 전후하여 500년 근처에 전남 해안 지역과 탐라까지의 편입이 이루어졌다고 보는것이 대체적인 중론인 듯.

-백제가 멸망한 직후인 662년 탐라국주 좌평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신라에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앞서 662년의 항복은 형식적인 것이고 한반도의 정리가 끝난 679년에 신라가 여유가 생긴 뒤 본격적으로 속국화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후 탐라국은 892년 육지에서 후삼국시대가 개막할 때까지 통일신라에 정기적으로 조공하였다.

-김헌창의 난 때(822)는 신라 귀족들 일부가 탐라국으로 대피하기도 했다.

 

4. 군현이 외사정인 이유는?

외사정: 바깥에서 올바르게 살펴봄. 673(문무왕 13)에 행정통제와 관리감찰을 위해 설치한 외관직이다. 근무지는 지방이었지만 주·군의 장관 밑에 소속되지 않고 중앙의 감찰기구인 사정부(司正府) 소속의 관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수리: 지상에서 지키는 벼슬아치. 기인(其人)의 전신인 상수리에 관한 자료는 삼국유사(三國遺事)2 문호왕법민조(文虎王法敏條)에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수리 제도는 지방 세력을 효과적으로 감시·통제하기 위한 하나의 방략이 되었다. 신라시대에 볼모로 왕경(王京)인 경주에 머물던 지방의 향리.

 

5. 촌이 상수리인 이유는? ^^;; 그게 아니구 시골 출신이 임시적으로 서울에 머무는 것을 말해.

6. 9서당 10정은 뭐야

고구려인 · 백제인 · 말갈인 중에서 용감한 자를 뽑아 조직했으며, 옷깃의 색에 따라 부대 명칭을 구별했다. 10정은 지방군 제도로 685(신문왕 5)95소경의 지방 제도를 정비하며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신라에서는 정을 부대, 군영 등의 의미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9서당 10[九誓幢十停] (Basic 중학생을 위한 국사 용어사전, 2006. 11. 15., 이은석)

 

9강. 통일 신라의 발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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