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

붕당과 양란, 혼란이 배가 되다

정알못 2021. 2. 9. 22:43

1. 동인과 서인: 김효원과 심의겸의 끊임없는 견제

 

동인과 서인의 현재 위치

원조 이미지 출처: kbs 역사저널 그날, 그림 이혁

http://newsteacher.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1/25/2016012500446.html

 

이조 전랑

 

5000(기성 사림) VS 1000(신진 사림) ~~ 누가 이길 것인가

 

1574년 조정기()의 추천으로 결국 김효원이 이조전랑이 되었다.

1575년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이조전랑으로 추천되자, 전랑의 관직은 척신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고 이발()을 추천했다.

 

이러한 일을 계기로 심의겸과의 반목이 심해지면서, 사림계는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효원 [金孝元]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두 사람의 대립이 점차 심해지자,

우의정 노수신(), 부제학 이이() 등이 분규의 완화를 조정하고자 두 사람 모두 외직으로 내보낼 것을 건의해, 심의겸은 개성부유수로, 김효원은 경흥부사로 나갔다.

 

그러나 김효원을 지지하는 후배들은 축출한 것이라 반발해 다시 부령부사로 옮기게 했다. 그러나 이 역시 부령이 변방이라고 반발하므로 다시 삼척부사로 옮기게 되었다.

 

결국 노수신과 이이의 조정은 실패했고, 선조는 당쟁의 완화를 위한 조처로 이조전랑의 추천·교대 제도를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그 뒤 사간의 물망에 올랐으나 선조가 허락하지 않아 내직에 복귀하지 못했고, 당쟁이 더욱 심해지면서 안악군수로 자청해 나갔다.

 

이 후 10여년 간 한직()에 머물며 당쟁이 일어난 것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시사()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후에 선조의 특명으로 영흥부사로 승진해 재직 중 죽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삼척의 경행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는 『성암집()』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효원 [金孝元]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정여립의 모반사건

정여립은 당시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던 이이(, 1536~1584)와 성혼(, 1535~1598)의 각별한 인정을 받았다. 다시 말해서 그는 서인(西)의 촉망 받는 젊은 인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중년에 와서 급변했다. 1584년(선조 17년) 수찬이 된 뒤 이이ㆍ성혼ㆍ박순() 등 서인의 주요 인물을 비판하고 동인으로 돌아선 것이다.

 

아무튼 그는 갑자기 당파를 바꿨고, 선조는 그것을 비판했다. 그러자 정여립은 즉시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정여립은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짓고 대동계를 조직해 매달 활쏘기 모임을 열면서 세력을 확장했다.1587년(선조 20년) 왜선들이 전라도 손죽도()에 침입하자 전주부윤 남언경()의 요청으로 출동해 물리친 것은 그런 측면을 잘 보여준다.

 

네이버 웹툰 조선왕조실톡의 81화

URL: youtu.be/w2wUXJeVFLw

정여립은 “천하는 공공의 물건()”이며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랴()”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각각 중국 전국시대 때 왕촉()과 맹자()의 발언이지만, 그것을 먼 후대의 왕조국가에서 거론하고 지지했다는 것은 엄청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신채호()는 이런 측면에 주목해 정여립을 혁명적인 사상가로 높이 평가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여립 [鄭汝立] - 논란에 싸인 기축옥사의 주인공 (인물한국사, 김범)

기축년()인 1589년(선조 22) 정여립()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는 고변()에서 시작해 그 뒤 1591년까지 그와 연루된 수많은 동인()의 인물들이 희생된 사건이다. 동인()과 서인(西)의 대립과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계기가 된 사건이기도 하다.

정여립의 사건과 관련된 국문()은 3년 가까이 계속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동인 1,000여 명이 화를 입었으며,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동인은 몰락하고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호남 출신의 관직 등용에 제한이 가해지기도 했다. 1591년 서인들은 이산해()와 류성룡()도 정여립 사건과 연루된 것으로 몰아가려 했으나, 서인들의 지나친 세력 확대에 반발한 선조가 정철을 파직함으로써 기축년에 시작된 옥사()가 마무리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기축옥사 [己丑獄事] (두산백과)

 

정철이 실각하자 서인의 대부분이 숙청되었고, 정여립 모반사건 이후 정권을 뺏겼던 동인은 건저문제로 완전히 정권을 장악하였다. 동인의 건저문제를 이용한 서인 숙청은 기축옥사에 대한 복수인 샘이었다. 이후 동인은 인조반정이 있기까지 30여 년을 집권하였다. 한편 세자는 다음해 유배 간 정철이 건의했던 광해군으로 책봉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건저문제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조선시대 유배문화), 2005., 한국콘텐츠진흥원)

 

오잉? 정철이 광해군을 왜 책봉을 건의했을까..

사실 정철이 모르는 음모가 있었다.

그당시 상황: 선조는 인빈 김씨의 신성군을 총애하고 있었음

동인의 이산해는 선조의 총애가 누구를 향하는지(그때 신성군) 알고 있었지만 정철은 암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산해는 인빈에게 정철이 광해군을 지목해서 나중에 신성군을 죽이려한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인빈은 거짓말을 믿고 정철에 대해 분노하였다.

 

결국 세자 책봉이 미루어졌다.  

 

*이산해가 누구인가요?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한음 이덕형의 장인이다.숙부 이지함이 직접 글을 가르치다가 남명 조식에게 보내고 이어 이황의 서원에도 출입하여 제자가 되었다.그 뒤 초시를 거쳐 성균관에 입학해 학문을 배우고 1561년(명종 16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이량 이감의 탄핵을 받았으나 극적으로 기사회생하여 여러 관직을 지냈다.

 

-> 어쨌거나 정철의 처벌 수위를 놓고 정인홍() 등을 중심으로 한 적극적인 배격과 류성룡() 등의 온건한 입장이 대립하였고, 이들이 각기 서인에 대한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분리되었다.

 

요약: 북인- 정철 등의 서인들은 철저히 배격해야 하옵니다!!

       남인- 에이... 왜그래~~ 그럴 수도 있잖어? 응?

 

3. 임진왜란 

 

[동인의 흥망 성쇠]

-배경: 왜란 이전의 동인 장악

-사건: 동인의 붕괴- 남인과 북인

-결과: 광해군 때 북인; 권력 독점

 

여기부터 네이버 웹툰 조선왕조실톡 선조~ 광해군 요약본입니당.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 웹툰을 참고하세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임시적으로 세자를 책봉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광해군이다.

 

4. 대북파와 소북파

한편 선조가 다른 정실 부인을 데리고 와서 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그 아이를 왕으로 앉힐 것인가

아니면 광해군을 그대로 왕으로 추대할 것인가를 논하게 된다.

 

대북파- 임진왜란 때 힘들게 겪으신 광해군이 왕위를!!!

소북파- 정실 부인의 영창대군을 왕으로!!

광해군의 중립 외교

우여곡절 끝에 광해군이 즉위하게 되고, 대동법(쌀로 공납을 내게 하도록 하는 것-> 토지가 많은 사람 일수록 세금을 많이 내게 한다)과 중립 외교를 행합니다. 

URL: youtu.be/6KOry-MhjtA

한편, 광해군은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하였기에 영창대군과 관련된 이들을 숙청 또는 감금시켰습니다.

서인들은 광해군의 왕권 강화와 중립 외교에 심히 반발하였고... 결국 광해군은 폐위됩니다. 

안돼,,..

 

혹시 광해군 이외의 선조들의 자식들의 행보가 궁금하다면 이 글을 참고하세요!

URL: 자식농사 하나는 기가막히게 한 선조 - 스퀘어 카테고리 (theqoo.net)

 

 

그 이후에는 인조가 후금에게 이마로 머리 3번 꽝꽝꽝... ^^;; 진짜 싫다...